하루는 필자의 진료실에 60대 초반의 여자분이 딸과 함께 방문하였다. 한 달 가까이 현관문 밖으로 나가지 못한 것이 방문의 주된 이유였다. 못 나가는 이유를 묻자 돌아온 대답은 정말 뜻밖이었다.

같은 빌라에 사는 청년들이 다 본인을 너무도 좋아해서, 무서워서 못 나가고 있다고 했다. 부연해서, 다들 항상 자신을 따라다니고, 집에 있으면 문밖에서 본인이 나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이를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를 묻고 나서야 이분의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그들이 본인을 따라다니는 것을 실제로 본 적은 없었지만, 걷다가 뒤를 돌아보면 항상 딴청을 피우는 청년이 눈에 띄었고,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있으면 역시 반대편에 이와 같은 청년들이 또 있었다고 했다. 그들은 동일인이 아니었지만, 뭔가 낯이 익은 느낌이 들었고, 곰곰이 생각해 보자 현재 사는 빌라에서 본 적이 있는 것 같았다고 했다.

딸에게서 몇 가지 중요한 정보를 더 얻을 수 있었다. 어머니가 현재 혼자 살고 있고, 가사와 공과금 납부를 비롯한 모든 일들을 혼자서 큰 문제 없이 처리하고 있었지만, 최근 들어서 집안 정리 상태에 작은 변화들이 느껴졌다고 했다. 그리고 과거에 이런 모습을 보인 적이 한 번도 없었다는 점을 강조했다. 마음이 무거웠다. 모녀에게 여러 가능성에 대해 설명하고, 필요한 검사를 시행하기로 했다.
한 달이 지나 두번째 만남을 가졌다. 염려했던 대로 진단은 초기 치매였다. 집안 정리 상태의 변화는 치매로 인한 인지기능의 저하 때문이었고, 청년들에 대한 망상은 치매로 인한 정신행동증상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여기까지 설명하면 많은 분들은 이렇게 탄식한다. “내가 노망이 난 건가…”

대중의 인식 속에서 치매와 노망 사이의 거리가 크지 않은 것 같다. 실제로 사전에도 ‘노망’을 ‘늙어서 망령이 듦’이라 설명하고 있고, ‘망령’은 늙거나 정신이 흐려서 말이나 행동이 정상을 벗어남’이라 설명하고 있으니(네이버 사전) 그렇게 받아들여지는 것이 무리도 아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치매 환자들은 이러한 모습을 보이지 않고, 보이는 경우에도 이를 완화시킬 수 있는 방법들이 많이 있다 보니 이러한 부정적인 느낌의 단어가 필자의 환자들과 연결되는 것이 너무나 안타깝다.

치매는 우리나라 65세 이상 성인 10명 중 한 명이 겪고 있을 정도로 흔한 병이고, 아직까지 확실한 치료법이나 예방법이 없다. 암은 초기에 잘라내면 완치를 바랄 수 있고, 당뇨, 고혈압, 이상지질혈증과 같은 만성질환도 잘 관리하면 건강한 삶을 오랜 기간 누릴 수 있다. 그러나 치매는 그렇지 않다. 아무리 열심히 관리하고 보살펴도 치매는 계속 진행된다. 이렇다 보니 한국인이 가장 무서워하는 병이다. 그러나 치매가 이토록 두려운 결정적인 이유는 ‘정신행동증상’ 때문일 것이다.

치매의 알맹이는 인지기능의 저하이고, 인지기능은 우리 뇌의 핵심 기능이다. 여기에는 기억력 외에도 시공간 감각, 언어능력, 판단력 등이 포함된다. 어제 봤던 호랑이의 모습을 기억해야 오늘 도망칠 수가 있고, 열매 따러 갔다가 집에 찾아올 수 있어야 얼어 죽지 않을 수 있다. 인지기능은 이와 같이 우리를 죽지 않게 해주는 기능이다. 동굴에서 열매 따먹던 시절에는 이 정도의 뇌로 충분했다.

그런데 인간은 너무 진화해버렸다.
이제는 수많은 사람들과 예의라는 틀에 맞추어 교류해야 하고, 끝없는 자극의 소용돌이 속에서 의미 없는 것들을 걸러내야 한다. 진화의 기본 단위는 10,000년에서 시작하지만, 우리는 불과 백 년 만에 이러한 능력을 터득해야 했다. 전에는 대변을 보고 싶을 때 보고, 먹고 싶은 것을 먹고, 자고 싶을 때 잤다. 그런데 이제 우리의 뇌는 대변을 어디서만 봐야 하는지, 이 기호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어느 시간에 자야 새나라 어린이라 칭찬받는지 알아야 한다.
이런 기능들에 문제가 생기는 것을 전문용어로 ‘정신행동증상’이라 칭한다. 정신행동증상은 망상, 환청, 초조, 우울, 불안, 다행감, 무감동, 탈억제, 과민성, 이상 운동 행동, 야간 행동, 식습관의 변화의 12가지로 분류하고, 필자는 환자들에게 치매의 ‘곁다리 증상’이라 설명한다. (정신행동증상에 대한 자세한 정보는 중앙치매센터 홈페이지 ‘치매 대백과’의 ‘치매, 어떤 병인가요?’ 페이지 참조)

정신행동증상은 가족들을 가장 힘들게 하는 증상이고, 요양원을 고민하게 하는 주된 증상이다. 그런데 이러한 증상들을 환자의 입장에서 보면 그렇게 이상한 행동이 아니다. 벽에 똥칠을 하고 있다고? 환자는 예술을 하고 있을 뿐이다. 밤에 돌아다닌다고? 환자는 자고 싶은 시간에 자는 것일 뿐이다. 환자의 증상을 다 받아줘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헌신하는 보호자들을 비난하려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다만, 환자의 입장에서 이해를 구하려는 것뿐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환자들이 정신행동증상을 경험하게 되지만, 초기부터 잘 관리하면 정신행동증상이 나타나는 것을 줄일 수 있고, 이미 나타났다 하더라도 적절하게 대응하면 힘을 덜 들이고 고비를 넘길 수 있다.

유명 대학에서 평생 연구하며 지낸 70대 여자분이 아들과 함께 찾아왔다. 이분은 주변에서 본인을 괴롭히고 있다고 이야기했다. 아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어머니가 집에 쓰레기를 잔뜩 모아두었고, 기이한 행동으로 고소까지 당한 상황이라고 했다. 설득 후 치매 검사를 진행하였고, 결과는 초기 치매로 나왔다.
이 결과에 대해 숨김없이 설명하고, 관리의 중요성에 대해 강조했다. 아들에게는 기이한 행동보다는 치매 관리에 초점을 맞추어 어머니를 대하도록 했다. 약물 치료로 기이한 행동이 줄었고, 자녀들은 어머니가 치매 관리에 집중할 수 있도록 유도하여 이분은 열정적으로 인지재활 요법에 참여하기 시작하였다. 치매는 진행되었고, 간혹 본인을 괴롭혔던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이분은 열정을 잃지 않고 아주 즐겁게 지내고 있다.

정신행동증상에 대응하는 방법은 이 외에도 많이 있다. (중앙치매센터 홈페이지 ‘정보’ - ‘자료실’ - ‘영상’ 페이지의 ‘치매조호교육영상’ 참조) 물론 누구나가 이렇게 극적으로 좋아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적절한 이해와 돌봄이 동반되면 환자 본인과 가족들의 시련을 최소한으로 줄이고 비교적 편안한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