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고 지루했던 팬데믹의 터널을 나와 비로소 평범하지만 일상이 소중하게 느껴지는 요즈음... 매년 코끝이 차가워지는 이맘때면 개원 기념행사로 여러 다양한 축하 인사들이 오가며 훈훈한 겨울을 맞이합니다.
저의 35년 근속을 축하해 주신 모든 분들께도 이 글을 빌려 다시 한번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계요병원(구,안양신경정신병원)과의 인연은 고3 때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당시 담임선생님의 권유로 생각지도 못했던 간호학을 미래 진로로 선택하게 되었고, 운명처럼 정신과에 몸을 담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계요병원에 입사했던 1988년은 여전히 정신과에 대한 부정적인 편견이 팽배했던 시대였기에 저희 부모님의 걱정이 많았습니다.

아직도 서울 올림픽이 열리던 그 해 3월, 생애 처음으로 봉투에 담긴 월급을 받았었고, 며칠만에 다 쓰고 난 후 본가에 가서 월급보다 더 많은 용돈을 받아왔던 그런 철없던 20대의 기억이 생생합니다.
그런 저를 지금 이만큼이나 성장시킨 곳이 바로 이곳, 계요병원입니다.

처음부터 제가 원하고 꿈꾸었던 일은 아니었을지라도, 이곳 정신과 대상자들과 함께 지내며 그분들의 마음을 헤아리고 치유하는 과정을 직접 보고 배우면서 저 역시 한 뼘 더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곳에서 저는 결혼도 하고 딸, 아들을 키우면서 하루하루 소중한 일상을 새길 수 있었습니다.
퇴근 후 오롯이 나를 위해 보냈던 시간들도, 동기들과 야간근무 끝나자마자 함께 냉큼 떠났던 여행도, 전국 방방곡곡 산 정상을 밟으면서 느꼈던 희열도 모두 소중한 추억입니다.

프랑스 저자의 <삶은 흐른다> 추천글에서 삶은 등산보다 항해에 가까운 듯하다는 말씀이 문득 생각납니다.
“등산을 하다 발을 헛디뎌 넘어질 순 있어도 산이 스스로 너울거리며 나를 흔들지는 않는다. 하지만 바다는 다르다. 바다는 쉬이 너울대며 나를, 내 삶을 예상치 못한 곳으로 흘러버리곤 한다…” 저는 너울대는 바다에 그저 몸을 맡긴 채 여기까지 와 있습니다.

신규 때 병동에 입원해 계시던 분을 지금까지도 매일 마주하는 병동에서 매너리즘에 쉬이 빠져버리지 않을까 항상 걱정하고 경계했습니다. 이에 늘 환자 곁에서 어떤 말이 어떤 행동이 도움이 될 수 있을지 고민했고, 환자뿐만 아니라 환자를 둘러싼 주변 환경들까지도 모두 치료 범위에 포함시키고자 노력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겪게 된 모든 경험과 에피소드들은 지금 생각해 보니 저의 좋은 스승이자 멘토가 되어 저를 더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게 한거 같습니다.
저의 35년 병원생활을 지금껏 풍족하게 만들어주신 스승님, 선, 후배 선생님들, 그리고 지금 이 순간까지 병원 각자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는 모든 분들 덕분에 저도 잘 흘러가는 듯합니다.

계요병원 49주년을 진심으로 축복하며,
글로벌한 최고의 치료공간이자 마음의 안식처로 거듭나는 모두가 함께하는 찬란한
계요병원 50주년, 100주년의 미래가 기대됩니다. 2023년 어느 초겨울, 이영분